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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리를 무는 호기심

단종과 죽은 여자들

 

단종의 곁에는 죽은 남자들과 죽을 뻔한 남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죽은 여자들과 죽을 뻔한 여자들도 있었다. 특히 이전 권력자의 여종들과 점쟁이들이 비참하게 죽었다. 

아래 세조실록을 인용하여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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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사신의 연회에서 무녀들의 처형까지

1456년 단종 복위 모의의 전말

1455년 단종은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기고 상왕(上王, 왕위에서 물러난 전임 국왕)이 되었다. 세조가 즉위한 뒤에도 성삼문·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을 중심으로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려는 움직임이 이어졌다.

이 계획은 흔히 ‘사육신의 단종 복위 운동’으로 불린다. 그러나 《세조실록》의 수사 기록을 따라가면 사건은 문신과 무신만의 모의가 아니었다. 단종의 외척, 유모의 여종, 외척 집안의 여종, 궁녀, 무녀(巫女, 신령을 매개하여 점과 굿을 행하던 여성), 판수(判數, 주로 시각장애인 남성이 종사하던 점술가)까지 연결된 신분을 아우르는 관계망이 존재하였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2일

명나라 사신의 연회에서 실행하지 못한 거사

《세조실록》 6월 2일 기사는 전날인 6월 1일 창덕궁 연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국문 진술의 형태로 기록한다.

세조는 단종과 함께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를 열었다. 복위 세력은 이 자리를 세조와 주요 대신들을 제거할 기회로 삼았다. 성승·유응부·박쟁은 별운검(別雲劍, 큰 칼을 차고 임금 가까이에 서던 임시 무관)으로 연회장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들이 세조 곁에 접근할 수 있다면, 연회 도중 공격을 실행하기가 어렵지 않다는 계산이었다. 궁 밖에서는 김문기 등이 군사를 움직여 반대 세력을 제압하고, 단종을 다시 왕위에 올리는 구상이 있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그러나 당일 세조는 전각이 좁다는 이유로 별운검을 연회장 안에 들이지 않았다. 세조의 세자도 연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공격을 맡은 무관들이 세조 가까이에 접근하지 못하면서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

복위 세력은 계획을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박팽년의 국문 진술에 따르면 이들은 이후 세조가 관가(觀稼, 국왕이 농작물의 작황을 살피는 행사)를 나갈 때 길에서 다시 거사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두 번째 계획이 실행되기 전에 내부 고발이 먼저 일어났다.

성균사예(成均司藝, 성균관의 정4품 관직) 김질은 모의에 참여하거나 적어도 그 내용을 알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는 장인 정창손에게 성삼문에게서 들은 계획을 털어놓았다. 정창손은 당시 의정부 우찬성(議政府右贊成, 의정부의 종1품 관직)이었다.

김질과 정창손은 6월 2일 세조에게 비밀히 아뢸 일이 있다고 청한 뒤 성삼문의 계획을 고변(告變, 반역이나 중대한 범죄를 국왕 또는 관청에 신고함)하였다. 김질은 성삼문이 단종을 다시 세우고 한명회·신숙주·권람 등 세조의 측근을 제거하려 했다고 진술하였다.

세조는 즉시 숙위군을 소집하고 성삼문을 체포하였다. 성삼문은 처음에는 구체적인 내용을 부인했으나 김질과 대질한 뒤 박팽년·이개·하위지·유성원 등과 함께 모의했다고 진술하였다. 관련자들은 곤장을 맞으며 공범의 이름과 계획을 추궁받았다. 유성원은 사건이 발각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날의 고변은 연회장에서 무산된 계획을 대규모 정치 사건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계기였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8일

수사망이 아가지와 불덕에게까지 확대되다

6월 8일 세조는 사정전(思政殿, 경복궁에서 국왕이 정무를 보던 전각)에서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의금부의 재판을 지휘하던 고위 관원), 승지와 대간을 불러 관련자들을 직접 심문하게 하였다.

이날 끌려온 사람 가운데 두 명의 여자가 있었다.

아가지(阿加之)는 단종의 유모인 봉보부인(奉保夫人, 국왕의 유모에게 주던 정1품 외명부 작호)의 여종이었다. 불덕(佛德)은 단종의 외숙 권자신의 어머니 집에서 일하던 여종이었다. 권자신의 어머니는 단종의 외할머니 아지(해주 최씨)였다.

아가지와 불덕은 성삼문·이개·하위지·김문기·유응부·권자신 등과 함께 곤장을 맞으며 당여(黨與, 같은 계획에 참여한 무리)를 추궁받았다.

의금부는 두 여자를 단순한 주인의 종이나 역적 가족의 연좌자로 판단하지 않았다. 의금부의 판결문은 아가지와 불덕을 복위 모의에 직접 결당한 사람으로 열거하였다. 이들이 단종을 내세워 국정을 장악하고 6월 1일 거사하려 했으므로 능지처사(凌遲處死, 반역 등의 중죄에 적용된 최고 사형)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세조는 판결을 승인했다. 다만 아가지와 불덕의 가족에게는 연좌(緣坐, 범죄인의 가족과 친족에게까지 처벌을 확대하는 제도)를 적용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는 두 사람 본인의 형벌을 면제한 것이 아니라 가족 처벌만 없앤 조치였다.

같은 기사에는 백관을 군기감(軍器監, 무기의 제작과 관리를 담당한 관청) 앞에 세워 놓고 ‘이개 등’을 환열(轘裂, 수레 등을 이용해 신체를 찢는 처형)한 뒤 사흘간 효수(梟首, 처형한 사람의 머리를 공개적으로 전시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이개 등’이 아가지와 불덕까지 포함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특히 아가지는 이틀 뒤인 6월 10일 다시 별도의 능지처사 판결을 받는다. 따라서 아가지가 6월 8일 남성 피고인들과 함께 처단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10일

아가지 부부의 칼 전달 사실이 드러나다

6월 10일 의금부는 아가지와 남편 이오의 구체적인 행동을 별도로 보고하였다.

의금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오와 아가지는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면서 6월 1일 창덕궁 연회에 맞추어 내상고(內廂庫, 궁중 호위군인 내금위에 소속된 창고)의 칼 한 자루를 빼냈다.

두 사람은 이 칼을 별감(別監, 궁중의 잡무와 실무를 담당한 하급 관원) 석을중에게 은밀히 주고, 단종의 외숙 권자신에게 전달하도록 하였다. 그 뒤 이들은 거사가 일어나는지를 지켜보았다고 기록된다.

이 기록은 아가지가 계획을 단순히 전해 들은 사람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그는 남편과 함께 무기 전달에 관여했고, 거사의 결과를 기다린 인물로 기소되었다.

다만 사료에는 아가지가 직접 창고에서 칼을 꺼냈는지, 석을중이 실제로 권자신에게 칼을 전달했는지, 그 칼을 누구에게 사용하려 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아가지가 세조를 직접 공격할 예정이었다고까지 서술하는 것은 사료의 범위를 넘어선다.

의금부는 이오와 아가지에게 능지처사를 적용하고 재산 적몰(籍沒, 범죄인의 재산을 국가에 귀속시킴)과 가족 연좌를 시행하자고 청하였다. 세조는 그대로 승인하였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16일

무당 용안이 단종의 복위를 예언하다

수사는 아가지와 불덕이 접촉한 점술가에게로 이어졌다.

무당 용안(龍眼)은 아가지와 불덕의 요청을 받고 단종의 운명을 점쳤다. 실록에 따르면 용안은 단종이 그해에 다시 왕위에 오르는 경사가 있을 것이라는 취지의 말을 하였다.

이 발언은 단순한 사적인 길흉 판단으로 처리되지 않았다. 세조 정권은 “단종이 다시 왕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현 국왕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복위 모의를 뒷받침하는 정치적 발언으로 판단하였다.

의금부는 용안에게 능지처사, 재산 적몰과 가족 연좌를 적용하자고 청하였다. 세조는 용안 본인의 능지처사는 승인하면서도 가족은 연좌시키지 말라고 명하였다.

용안이 실제로 거열이나 환열로 처형된 날짜와 장소는 별도의 기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확실히 확인되는 것은 능지처사 판결이 재가되었다는 사실이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18일

봉보부인의 점복과 아가지의 발언이 국문에서 드러나다

6월 18일의 국문 기록에서는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궁녀와 무당과의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먼저 단종의 외할머니 아지(阿只)가 심문받았다. 아지는 권전의 아내이자 현덕왕후의 어머니이며, 단종의 외숙 권자신의 모친이었다.

세조는 아지에게 권자신을 통해 홍주 사람들을 불러오게 한 사실과 단종에게 복위 계획을 알린 경위를 추궁하였다. 아지는 단종에게 하위지와 성씨 성을 가진 사람이 일을 도모한다고 말했다고 진술하였다. 이는 아지가 단종과 궁 밖 복위 세력 사이에서 정보를 전달한 인물로 조사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어 판수 나가을두(羅加乙豆)가 심문받았다.

나가을두의 진술에 따르면 단종의 유모인 봉보부인은 사람을 보내 궁궐 북쪽에서 부엉이가 우는 까닭을 물었다. 나가을두가 평안하고 즐거운 징조라고 답하자, 심부름꾼은 그것이 단종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가 아니냐고 다시 물었다.

나가을두는 단종이 오래지 않아 왕위로 돌아갈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로써 단종의 유모 봉보부인도 사람을 시켜 단종의 복귀 가능성을 점치게 한 사실이 국문 기록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봉보부인 자신이 사형이나 유배를 받았다는 기록은 이 기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같은 날 궁녀 춘월과 충개도 심문받았다. 두 사람의 진술에 따르면 아가지는 실제 거사 예정일인 6월 1일 두 사람을 불러 바깥사람들이 ‘우리 임금’을 다시 세우려 한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언제 일이 일어나느냐고 묻자 아가지는 그날 잔치가 끝난 뒤라고 답하였다. 춘월과 충개는 거사가 성공하면 아가지의 남편 이오가 승진하여 금띠를 띠게 될 것이라는 취지로 말했다고 진술하였다.

이 증언은 아가지가 복위의 목적뿐 아니라 거사일과 실행 시점까지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다만 이 기록은 춘월과 충개가 곤장과 국문을 받는 상황에서 한 진술이다. 현대적인 의미의 자유로운 참고인 진술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18일

단종의 외할머니 아지가 실제로 거열되다

같은 날짜의 다음 기사에서 의금부는 아지·심신·박기년·이정상·이지영 등이 박팽년·이개·성삼문과 함께 역모를 꾀했다고 판정하였다.

춘월과 충개도 아가지에게서 역모 계획을 듣고 알고 있었으므로 능지처사 대상에 포함되었다.

세조는 춘월과 충개의 사형만 감하였다. 두 사람에게 장 100대를 치고 변방 고을의 관비(官婢, 관청에 소속된 여성 노비)로 영구 편입시키도록 명하였다.

아지와 나머지 피고인들의 능지처사는 승인되었다. 백관을 군기감 앞에 둘러세운 뒤 이들을 거열하여 보이고, 처형한 머리를 저자에 사흘 동안 전시하였다.

기사의 문장 구조상 아지는 이날 실제 거열 집행 대상에 포함된다. 따라서 단종의 외할머니 아지는 단순히 능지처사 판결만 받은 사람이 아니라 실제 거열이 직접 확인되는 사람이다.

아가지·불덕과 달리 아지의 처형 방식은 기사에 분명히 나타난다.


실록 기록일: 1456년 음력 6월 27일

무당 내은덕·덕비와 판수 나가을두가 참형되다

수사는 그달 말까지 계속되었다.

6월 27일 의금부는 무당 내은덕(內隱德)·덕비(德非), 심상좌와 판수 나가을두 등이 역모에 가담했다고 보고하였다. 의금부가 처음 청한 형벌은 모두 능지처사였다.

그러나 세조는 이들을 모두 참형(斬刑, 목을 베는 사형)에 처하도록 변경하였다. 나가을두의 가족은 연좌시키지 않았으며, 나머지 재산 몰수와 연좌 처분은 의금부의 건의대로 시행하게 하였다.

내은덕과 덕비는 무녀로 명시된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정확히 누구의 부탁을 받고 무엇을 점쳤는지는 해당 판결 기사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용안은 단종의 복위를 직접 예언한 내용이 남아 있지만, 내은덕과 덕비의 구체적인 점사 내용은 확인되지 않는다. 따라서 세 무녀가 모두 똑같은 말을 했다고 서술해서는 안 된다.

나가을두는 봉보부인의 사람에게 단종이 머지않아 복위할 것이라고 말한 사실이 앞선 6월 18일 국문에서 확인된다. 그는 능지처사 건의 대상이 되었지만 최종적으로는 참수되었다.


점괘가 반역의 증거가 되다

이 사건에서 점술은 거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성삼문·박팽년 등은 이미 무력 행동과 권력 장악을 계획하고 있었다. 아가지 부부는 칼의 전달에 관여했고, 아가지는 궁녀들에게 거사 날짜를 알렸다. 무녀와 판수에게 점을 물은 행위는 이미 진행되고 있던 계획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행동에 가까웠다.

그러나 계획이 발각된 뒤에는 점괘 자체가 반역의 증거가 되었다.

단종이 다시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말은 세조가 정당한 국왕이 아니라는 의미를 포함할 수 있었다. 세조 정권의 관점에서 복위 예언은 단순한 미신이나 사적인 희망이 아니라 현 왕권의 전복을 예고하고 지지하는 정치적 언어였다.

그 결과 용안은 능지처사를 선고받았고, 내은덕·덕비와 나가을두는 능지처사가 건의되었다가 참형으로 처형되었다.


실패한 거사가 주변 인물 전체의 숙청으로 이어지다

1456년 단종 복위 사건의 흐름은 다음과 같았다.

성삼문·박팽년 등의 복위 세력이 명나라 사신 접대 연회에서 세조를 제거하려 하였다. 별운검이 연회장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거사는 무산되었다. 이들은 다른 기회를 노리려 했지만 김질이 장인 정창손과 함께 계획을 고변하였다.

세조는 주요 인물들을 체포해 고문을 수반한 국문을 실시하였다. 피고인들의 진술을 따라 수사망은 단종의 외척과 궁녀에게 확대되었다.

아가지와 불덕은 복위 모의의 직접 가담자로 능지처사를 선고받았다. 아가지 부부가 칼을 전달한 사실도 별도로 판결되었다. 아가지와 불덕이 단종의 복위를 물었던 무녀 용안도 능지처사를 선고받았다.

국문 과정에서는 봉보부인이 판수 나가을두에게 단종의 운명을 물은 사실과, 아가지가 춘월·충개에게 거사일을 알린 사실이 드러났다. 단종의 외할머니 아지는 실제 거열되어 효수되었다.

내은덕·덕비와 나가을두는 능지처사 대상에 올랐으나 최종적으로 참수되었다. 춘월과 충개는 사형에서 감형되어 장 100대를 맞고 변방의 관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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